당신은 소중합니다(2)
명품 인생
마태복음 5장38-42절
2024년 8월 11일
결단찬송: 내 주의 은혜의 강가로
우리는 행복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셨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친히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요구된 가장 높은 수준의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손해를 봤다면 자신이 받은 손해 만큼만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자기를 더 사랑해서, 자신이 입힌 손해보다 자신이 당한 것을 훨씬 더 심각하게 계산해서 하나를 당하면 다섯이나 열 배로 갚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평균보다 더 높은, 천국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1)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2)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3)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4)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미 뺨 한대를 맞았고, 속옷도 빼앗기고 오리까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손해를 보고 있 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겉옷까지 주고 10리까지 가라는 것은 마치 더 큰 손해를 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요?
요즘은 작은 손해도 참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더 이상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닙니다. 손해는 참을 수 없고, 내가 손해를 받았다면 열배, 백배는 갚아줘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가만히 보면 오른편 빰을 맞고 고발당해서 속옷을 빼앗기는 상황입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덤벼 봤자 소용이 없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없이 계속 당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미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완곡한 표현이지만, 실은 우리가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피해를 막으시려는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은 이미 앞부분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 군가가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당장 그와 화해하라라는 강력한 주문을 하셨습니다.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들까 염려하라“
(마 5: 25)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입을 수 있는 더 큰 손해, 두 가지 손해를 언급하십니다.
첫째, 옥에 갇히는 손해를 당할 수 있고요. 또 하나의 손해는, 화해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가장 큰 손해죠.
손해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큰 손해는 피해야 합니다. 피해를 입고 있을 때, 더 큰 손해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더 큰 손해를 예방하는 지혜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더 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질투하지 않기
비교하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인생을 왜곡하지 않기를 하십시오.
인생의 진실은, 손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억울하게 인생의 빰을 맞고, 속옷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 속 터지는 일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더 큰 손해로 인해 고통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서 오늘 말씀을 주십니다.
“…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기든 왼편도 들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39-40)
그런데 이 말씀을 듣다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굳이 그렇게까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굳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굳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죄가 가져올 더 큰 피해를 막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명품 좋아하시죠?
왜 사람들이 명품을 그렇게도 사랑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본래 명품으로 창조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
이 땅에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 즉 명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명품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어서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명품 인생입니다.
명품인생이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구지) 그렇게까지 하는 인생입니다.
명품 인생은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 사람 좀 이상하네! 왜 이러지?
긍정적인 관심과 호기심을 갖다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짜 명품 인생입니다.
요즘은 날씨를 예고할 때 체감온도라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도 체감 온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각자의 체감이 다릅니다.
동일한 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큰 일이다 생각하고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체감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훨씬 더 유연하게 반응합니다.
실제 일어난 일보다 더 나쁘게, 더 심각하게, 더 힘들게 경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제 일어난 일보다는 덜 심각하게, 덜 아프게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체감 온도가 다른 것입니다.
인생의 비극은 실제보다 더 심각하게 느끼고, 더 불행하게 받아 들이고, 더 아파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더 큰 피해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은,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때 입게 될 영적 피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게 합시다.
피해를 키우지 맙시다.
우리는 이미 최로 인해서 충분히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미 용서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분노의 시간을 보내면서 손해를 입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습니가?
예수님은 우리 존재가 더 이상 손해를 입지 않기 바라십니다.
더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식으로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랑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용서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스스로 겸손해지고
굳이 그렇게까지 기도하는
최고의 인생들 되시길 바랍니다.